이 신화는 제주도에서 굿할 때 부르는 <천지왕 본풀이> 무가입니다.
인간계와 지옥계를 다스리는 신의 근원을 밝히는 내용
인간 세상에 수명장자라는 매우 극악무도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곧잘 괴롭히곤 하였으나, 사나운 말 아홉마리 와 소 아홉마리 그리고 개아홉 마리를 기르고 있기 때문에 감히 그에게 대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수명장자가 기고만장하여 천상의 천지왕을 향하여 소리쳤다.
"이 세상에서 나를 잡아갈 자가 과연 누가 있겠느냐?"
천지왕은 이 말을 듣고 괘씸하게 생각하여, 일만 군사를 거느리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서 수명장자의 집문 밖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에 앉았다. 그리고는 조화를 부려 소가 지붕 위에 올라가서 날뛰게 하고 솥과 솥뚜껑을 문 밖으로 나뒹굴게 하였지만 수명장자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천지왕은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수명장자의 머리에 씌워 놓아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했다.
그랬더니 수명장자는 종들을 불러 "내 머리가 너무 아프니 도끼로 깨쳐 버려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천지왕은 어이가 없어서 참 지독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두건을 도로 벗겨쓰고서 그만하면 됐으니 돌아가기로 결정 했다.
천지왕은 돌아가는 도중에 백주할멈의 집에 들려 하루만 유숙하고 가겠다고 했다.
"이런 누추한 집에서 천지왕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백주할멈은 극구 사양하면서 말했지만 천지왕은 괜찮다고 하며 유숙하기로 했다. 그러자 밥을 할 쌀이 없어서 노파가 걱정하니 천지 왕은 "수명장자의 집에 가서 쌀을 달라고 하면 이제는 줄 것이니 그것을 갖다가 밥을 하시오." 하고 말했다. 별 수 없이 노파는 수명장자에게 가서 쌀을 얻어다가 밥을 지어서 천지왕께 드리고 일만 군사를 대접했다.
식사를 마치고 천지왕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어디선가 옥빗으로 머리를 빗는 소리가 나서 이상하게 여긴 천지왕은 백주할멈을 불러 옥 빗으로 머리를 빗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우리 딸아기입니다."
천지왕은 노파의 딸을 불러 오라고 하야 만나보니 노파의 딸은 월궁의 선녀와 같이 아름다왔다.
그래서 천지왕은 그날 밤부터 삼일 동안 노파의 딸과 배필을 맺게 되었다. 삼일 후에 천지왕이 옥황으로 돌아가려 하자 부인은 그를 붙들며 말했다.
"천지왕께서 올라가 버리시면 저는 어찌 살며 만일 자식들이 태어 난다면 어찌합니까?"
"부인은 박이왕이 되어 인간 세상을 다스리시오. 그리고 자식들을 낳게 되면 이름을 대별왕, 소별왕이라 지어 잘 키운 다음 나를 만나 겠다고 하거든 증표를 줄 터이니 그것을 내어 주시오. 정월 축일에 박씨를 두 알 심으면 사월 축일에는 줄이 옥황까지 뻗쳐 올라갈 테 니 그 줄에 태워 옥황에게 보내면 될 것이오."
하고 증표를 건네 주고는 천지왕은 부인과 작별하고 천상의 옥황으로 올라갔다. 일년 후에 부인은 아들 형제를 낳았다.
그들이 무럭무럭 자라 나이 일곱이 되니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누구이며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다.
"너희 아버지는 옥황에 계시는 천지왕이시다."
"그러면 어찌해야 뵈올 수 있습니까?"
"박씨 두 알을 심어서 줄이 옥황에까지 뻗거든 이 증표를 가지고 올라가면 된다."
형제는 증표를 받고는 정월 축일에 박씨를 심으니 사월 축일에는 줄이 옥황까지 뻗어서 두 아들은 옥황에 올라가 천지왕을 만났다. 천지왕은 형제들을 보고 물었다.
"너희들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머니는 누구이며, 또한 증표는 가지고 왔느냐?"
"저희들의 이름은 대별왕, 소별왕이고, 어머니는 박이왕이십니다. 그리고 증표는 여기 있습니다."
하고 형제들이 증표를 내어 보이니 천지왕의 아들이 틀림없었다.
천지왕은 자기 아들이 이렇듯 장성하였다고 기뻐하면서 그들에게 신직(神職)을 부여하기로 했다.
"너희들은 인간의 길흉화복과 지옥의 죄인 다루는 일을 차지하여 다스리거라."
천지왕은 이렇게 말하고 은대야 둘에 꽃을 각각 심어서 두 아들에게 내주고는
"꽃이 잘 자라게 하는 사람이 인간 세상을 차지하고, 꽃이 잘자나지 않는 사람이 지옥을 차지하는 것이다." 고 하였다.
그래서 형제는 대야에다 꽃을 기르기 시작하였는데 소별왕이 기르는 꽃은 잘 안 되고, 대별왕이 기르는 꽃은 잘 되었다.
소별왕은 이것을 보고는 근심하였다. 만일 자기가 인간을 차지하고 형이 지옥을 차지하게 되면 수명장자에게 벌을 주어 행실을 가르칠 수 있지만, 형이 인간을 차지한다면 그렇게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별왕은 형이 잠든 사이에 형의 꽃을 자기 앞에 가져다 놓고 자기의 꽃을 형의 앞에다 놓은 후에 형을 깨웠다.
"무슨 까닭인지 갑자기 형님 꽃은 시들어 버리고 대신 제 꽃이 성하게 되었습니다."
대별왕은 동생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네가 그런 짓을 한 것을 아버님이 아시면 너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소별왕은 형에게 사죄하고는 꽃 대신에 수수께끼로 누가 인간 세상을 차지할 것인가를 결정하자고 했다.
대별왕이 그 제안을 허락하여 소별왕은 문제를 내었다.
"동백나무 잎은 무슨 연유로 겨울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속이 비어 있지 않아서 안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대나무는 왜 속이 비어 있는 데도 잎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대별왕이 대답을 못하자 소별왕은 다른 문제를 내었다.
"동산에 곡식은 잘 안 되고, 아랫밭 곡식은 잘 되는 까닭은 무엇 입니까?"
"흙과 물이 밑으로만 흘러서 동산의 곡식은 잘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랫밭 곡식이 잘 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대별왕은 답변을 못해 자기가 내기에 졌다는 것을 시인했다.
"형님이 인간을 차지하지 못하여도 동생이 맡아서 잘 할 수 있다면 좋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면 네가 인상 세상을 차지해라. 나는 지옥을 차지하겠다. 그대신 네가 만일 잘못 다스린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는 자기의 꽃을 동생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소별왕은 인간의 세상을 차지하고 대별왕은 지옥을 차지 하게 되었다.
소별왕은 즉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서 수명장자를 불러다가, "너는 인간에게 포악무도한 짓만 일삼았으니 용서할 수 없다." 하고는 능지처참을 해서 뼈와 살을 빻아 허공에 날리니 각각 파리, 모기, 빈대가 되었다.
소별왕은 수명장자를 패가망신 시킨 후에 인간에게 버릇을 가르치고, 복과 녹(祿)을 마련하여 선악을 구별하게 하고 나서 인간 세상을 잘 다스려 나갔다.
신화나 설화는 지역마다 차이를 보인다.
이번이야기는 앞부분은 동일하나 뒷부분이 조금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천지왕은 이제 세상의 혼잡한 질서가 바로 잡힐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대별왕에게는 이승을, 소별왕에게는 저승을 맡아 통치하도록 했다. 소별왕은 이승을 차지하고 싶어 꾀를 냈다.
“우리 수수께끼를 해서 이기는 자가 이승을 차지하고 지는 자는 저승을 차지하도록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형은 동생의 제안대로 하기로 하고 먼저 수수께끼를 시작했다.
“어떤 나무는 평생 밤낮 잎이 지지 않고 어떤 나무는 잎이 질까?”
“마디가 짤막한 나무는 잎이 지지 않고, 속이 빈 나무는 잎이 집니다.”
“모르는 소리 마라. 청대 갈대는 속이 비어 있어도 잎이 지지 않는다.”
동생이 졌다. 형이 다시 물었다.
“어떤 이유로 언덕 위의 풀은 잘 자라지 않고, 낮은 쪽의 풀은 무럭무럭 잘 자라느냐?"
“이삼 사월 샛바람 봄비에 언덕의 흙이 낮은 쪽으로 내려가니, 언덕의 풀은 잘 자라지 않고 낮은 데의 풀은 잘 자랍니다.”
“모르는 소리 마라. 사람은 머리털은 길고 발등 털은 짧지 않더냐.”
이번에도 진 동생은 다른 꾀를 냈다.
“형님. 그러면 우리 꽃을 심어서 잘 자라 꽃을 피우는 사람이 이승을 차지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형은 그러자고 하고 지부왕에게 가서 꽃씨를 받아다 저마다 심었다. 꽃씨는 곧 움이 돋아났다.
그런데 형이 심은 것은 왕성하게 자라 꽃봉오리가 맺혔는데, 동생이 심은 것은 이울어져 갔다.
불안해진 동생은 또 얼른 꾀를 냈다.
“형님, 누가 잠을 잘 자나 내기나 한번 해봅시다.”
형제는 잠을 자기 시작했다. 동생은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다가 형이 깊이 잠들자 얼른 꽃을 바꿔치기 하고 형을 깨웠다.
일어나보니 형 앞의 꽃은 시들어가고 동생 앞의 꽃은 활짝 피어 있었다.
약속은 약속인지라 형은 어쩔 수 없이 이승을 동생에게 넘기며 말했다.
“소별왕아. 이승을 차지하긴 하라마는 인간 세상에는 살인, 역적 많으리라. 도둑도 많으리라. 남자는 자기 아내를 두고 남의 아내를 우러르기만 하고, 여자도 자기 남편 두고 남의 남편을 우러르기만 할 것이다.”
소별왕이 이승에 내려와 보니 과연 질서가 엉망이었다.
곤란해진 소별왕은 형에게 도움을 청했다.
대별왕은 이승에 내려와 우선 하늘에 떠있는 두 개의 해와 두 개의 달을 정리했다.
천근 활과 천근 살로 앞에 오는 해는 남겨두고 뒤에 오는 해를 쏘아 동해바다에 던졌다. 부서진 해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
또 앞에 오는 달은 남겨두고 뒤에 오는 달을 쏘아서 서해바다에 던졌다.
그래서 하늘에는 해와 달이 하나씩 뜨게 된 것이다.
송피가루 닷 말 닷 되를 세상에 뿌려 초목과 짐승의 혀를 굳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만이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귀신과 사람은 무게로써 갈랐다.
저울을 가지고 하나하나 달아 백근이 차면 인간으로 보내고, 백근이 못되면 귀신으로 처리해 정리했다.
그렇게 자연의 질서는 바로 잡았지만 대별왕은 더 수고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인간 세상에는 역적, 살인, 도둑, 간음이 여전히 많게 되었고, 저승법은 맑고 공정하게 된 것이다.